574돌 한글날이 다가옵니다.
예년 같았다면 서울 광화문 광장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경축식과 기념 공연 등이 열렸을 텐데요.
코로나19 시국인지라 아무래도 올해는
많은 분이 집에서 한글날을 맞게 될 듯합니다.
그래서 떠오른 한 사람. 바로 배우 한석규입니다.
한석규는 자타공인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 중 한 명이죠. 올해로 데뷔 30주년을 맞았다고 하는데요. 한 아이가 태어나 서른 살 어른으로 성장하는 긴 시간 동안 대중과 함께해온 셈입니다. 특히 그는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2011)와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2019)에서 세종대왕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습니다. 그 덕에 ‘세종대왕 전문 배우’라는 애칭까지 얻게 되었죠. 특히 <뿌리깊은 나무>는 한글 창제 과정을 극화한 작품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역사 속 성군 세종은, 어쩌면 한석규라는 대중적 배우를 통해 오늘날 우리 후손들에게 더욱 친숙한 위인으로 기억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ㅣ <뿌리깊은 나무>와 함께 읽을 만한 책 『훈민정음통사』
2011년 방영 당시 <뿌리깊은 나무>는 시청자들에게 매회 ‘한글 사랑’의 마음을 고양시켜주었습니다. 특히 후반부로 접어들면서는 꾸준히 자체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화제를 모았습니다. 이 드라마의 미덕은 뭐니 뭐니 해도, 한글 창제 과정에서의 정치권 다툼을 생생히 그려냈다는 점이죠.
소설, 드라마, 연극, 영화 같은 서사 예술에서는 늘 주·조연이 등장하게 마련입니다. 24부작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줄거리를 간략히 요약하면 ‘···그리하여 세종께서는 한글을 만드셨다’일 것입니다. 이 한 줄의 스토리 안에는, 주인공 세종을 비롯한 여러 인물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죠. 시청자들은 이러한 내러티브에 푹 빠져들어 한글 창제 과정을 평면적 역사가 아닌 입체적 ‘이야기’로서 받아들이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글을 갖게 된 역사를 교과서적이 아니라 극적(dramatic)으로 체감하는 셈이랄까요.
<뿌리깊은 나무>를 계기로 한글을 단순히 사랑하는 차원이 아니라, 얼마간 학술적 견지에서 이해하고 싶어진 시청자들도 분명히 계셨을 텐데요. 그러한 생각의 발로로써 훈민정음 공부를 시작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코로나19 시국의 이번 한글날, 집에서 조용히 <뿌리깊은 나무> 정주행과 더불어 훈민정음 이해를 계획한 분들도 적잖을 듯합니다.
이 대목에서 추천해드리고 싶은 책이 한 권 있습니다. 제목이 『훈민정음통사』(방종현 저, 이상규 주해, 올재 출판사, 2015년 개정증보판 출간)입니다. 이 책은 언어학자 방종현 선생(1905~1952)이 한글의 발달 과정을 정리한 동명의 원문에, 오늘날 이상규 박사(제7대 국립국어원장)가 훈민정음해례본의 현대어 해석을 추가한 학술서예요. 네, 그렇습니다. 일반 독자들에겐 다소 딱딱할 수 있는 학술서 말이에요.
ㅣ <뿌리깊은 나무>의 한석규, 『훈민정음통사』의 세종대왕
조심스러운 견해인데, <뿌리깊은 나무>를 보신 분들이라면 『훈민정음통사』가 그리 딱딱하게만 읽히진 않을 것입니다. 앞서 소개해드렸듯, 이 책은 훈민정음해례본을 현대어로 해석했는데요. 해례본에는 조선 시대 최고 지식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정인지(鄭麟趾)의 문장들이 실려 있죠. 흔히 ‘정인지 서문’이라 불리는 글입니다.(‘서문’이기는 하나, 실제로는 해례본의 마지막 장인 제7장에 수록돼 있습니다. 그래서 ‘정인지 후서’라 이르기도 합니다.) 드라마에서 배우 박혁권이 연기한 정인지의 이미지를 기억하신다면, 아래 인용문이 무척 생생하게 다가올 겁니다.
(···) 대개 외국의 말에 그 소리는 있어도 이 소리를 적을 만한 문자가 없는지라. 여기서 중국의 한자를 빌어서 통용하게 되나니, 이 형편은 마치 속담에 이른바 예조(모난 자루)와 원조(둥근 구멍)가 서로 합할 수 없다 함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훈민정음해례본 제7장 ‘정인지 서문’ 일부의 현대어 해석, 『훈민정음통사』 289쪽
동그란 구멍 안에 네모난 자루를 끼울 수 없다는 비유가 참으로 절묘합니다. 우리의 소리를 중국의 한자로 표현하는 일이 그처럼 어색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뜻이죠. 조선 시대 문신 정인지의 지식과 교양 수준을 짐작하게 됩니다. 물론, <뿌리깊은 나무> 속 박혁권 배우의 얼굴과 음성이 오버랩되기도 하고요.
<뿌리깊은 나무>를 통해 대중은 ‘최만리(崔萬理)’라는 이름도 똑똑히(!) 기억하게 됐습니다. 최만리는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한 대표적인 정치인이었죠. 드라마에선 최만리보다는 그와 뜻을 같이하는 정기준(가상의 인물이며 배우 윤제문이 연기했습니다)이 주요 인물로 다뤄졌는데요. 세종과 정기준의 대립각이 스토리라인의 주된 요소이기도 했습니다.
신 등이 보옵건대 언문은 그 제작됨이 지극히 신묘하여 실로 기물(物)을 창조하시고 지(智, 지혜)를 운용하심이 멀리 천고에 뛰어나십니다(夐出千古, 형출천고). 그러하오나 신 등이 구구한 관견(管見, 좁은 소견)으로써는 오히려 의아한 듯하온 것이 있사옵기로 삼가 감히 상소하오니 밝은 성재(聖裁, 임금님의 재가)가 계시옵소서.
(···)
신라 때에 설총(薛聰)이 지은 이두(吏讀)라는 것은 비록 비리(鄙俚, 비루하고 촌스러우나)한 것이라고 하기는 하지마는 그러나 그것은 그래도 다 중국에서 통행(通行, 서로 통할 수 있음)되는 한문 글자를 빌어 써 어조(語助)로 베풀게 함이라.(후략)
상께서 이 상소를 다 보시옵고 만리 등에게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다.
(···)
만일 인민을 편안케 하고자 하려는 데 그 근본되는 의사가 있는 것이라고 하면 지금의 이 언문도 또한 백성을 편안케 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럼에도 불경하게 너희들이 설총만을 옳다고 하고 그리고 너의 군상(君上)의 한 일은 그르다고 하는 것은 이 어인 일이냐?
(···)
또 너희들이 상소 가운데 말하기를 신기한 일예(一藝, 하나의 재주)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어떠한 말이냐? 내(予)가 노래(老來, 늘그막)에 소일거리를 가지기 어려우므로 늘 서적으로써 벗을 삼아오는바 어찌 너희들이 말한 바와 같이 옛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아한다는 말이냐. 또 이것은 전렵방응(田獵放鷹, 사냥하고 매를 잡는 일)의 그것 즉 사냥하고 매를 놓아 꿩을 잡는 그런 종류의 일이 아님을 먼저 알아야 한다.(후략)
* 최만리 상소문(위)과 이에 대한 세종의 다그침, 『훈민정음통사』 91~101쪽
위 인용문 또한 <뿌리깊은 나무>를 떠오르게 합니다. 극 중 최만리파(한글 창제 반대파) 정기준과 세종의 열띤 토론 장면 말입니다. 드라마 속 세종대왕이 “지*하고 자빠졌네!” 하고 일갈하는 모습도요.
ㅣ 역사 드라마를 역사 교보재로 활용하기
‘클레오파트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여왕이었다’라는 서술은, 명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1963년 작 <클레오파트라> 주연)의 이미지로써 다소간 서사성을 부여받게 됩니다. 물론 이 서사성이라는 건 어느 정도 극적 효과가 가미된 이미지죠. 역사 왜곡이라 불릴 수도 있습니다. 다만, 때때로 우리는 어떤 ‘이미지’를 참고하여 어떠한 사실을 좀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학창 시절 독후감 과제 때문에 읽었던 소설 <페스트>와, 오늘날 코로나19 사태에서 읽는 <페스트>는 확연히 다를 겁니다. 우리에게 코로나19라는 ‘이미지’가 각인돼 있기 때문이죠. 소설 속 흑사병 사태가 독자들의 현실 세계와 오버랩되면서 생생한 서사성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곧 다가올 한글날을 맞아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얘기를 길게 해봤습니다. 요컨대, 배우 한석규가 연기한 ‘이미지’를 참고한다면 훈민정음 속 세종대왕과 한글 창제 과정을 더 생생히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요? 574돌 한글날, 여러분 모두 뜻깊고 건강하게 보내시기 바라며,
세종대왕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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