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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야 산다/살림피는 생활정보

[살림피는 생활정보] 나쁜놈이라도 괜찮아! 조커만큼 매력적인, 그리고 서글픈 '악당캐' 3인방

 


지난 10월 2일 개봉한 <조커>. 글로벌 박스오피스에서 큰 흥행을 기록하고 있죠. 영화 속 주인공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의 조커 복장은 올해 핼러윈 데이의 인기 코스튬이었다는 풍문까지! 그야말로 세계 곳곳에 조커 열풍이 불고 있는 듯한데요.

 

빈민가의 가난한 코미디언 아서 플렉이  희대의 악당 '조커'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그린 <조커>,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조커는 슈퍼히어로 캐릭터 배트맨의 숙적입니다. 영화 <다크 나이트>, 미국 드라마 <고담> 등을 통해 한국 관객들에게도 익숙한 빌런(villain)이죠. 그렇습니다. 조커는 악역, 악인, 악한입니다. 이런 '나쁜 놈'이 대중적 인기를 얻는 이유, 과연 무엇일까요? 아마도 대중의 마음 한 구석에 억눌려 있던 어떤 감수성, 못내 분출하지 못하고 꾹꾹 눌러 담아야 했던 날것의 감정, 이런 것들을 악당 조커가 대신 표현해주었기 때문 아닐까 싶은데요. 즉, 우리 일반인들의 '감정 대리인' 역할을 해준 셈이죠.

이처럼 관객들의 '감정 대리인'으로서 지지를 얻은 '악당캐'는 조커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이번 시간엔 그들을 한 번 소환해보겠습니다.


 

ㅣ"나를 바다에 묻어줘. 내 조상들처럼." - 에릭 킬몽거 in <블랙 팬서>

 

<블랙 팬서>는 슈퍼히어로 영화로는 최초로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후보에 올랐던 작품이죠. 단순 블록버스터 이상의 깊이 있는 메시지를 담았기 때문인데요. 그 메시지란 바로 '흑인 인권 문제'입니다.

<블랙 팬서>의 빌런 에릭 킬몽거,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블랙 팬서>의 배경은 '와칸다'라는 아프리카의 왕국이죠. 이곳의 왕 티찰라(채드윅 보스만)가 바로 주인공 블랙 팬서입니다. 그리고 그와 갈등을 빚는 빌런이 에릭 킬몽거(마이클 B. 조던)이죠. 둘이 대립하게 된 계기가 퍽 의미심장합니다. 티찰라는 외부 세계와 단절하는 것이 와칸다 왕국을 지키는 길이라 믿습니다. 반면, 에릭 킬몽거는 와칸다 바깥, 그러니까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흑인 민족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창하죠. 이런 세계관 차이로 인해 둘은 동지에서 적으로 갈라섭니다.

자신의 사상을 관철시키기 위해 에릭 킬몽거는 국왕 티찰라에게 도전합니다. 왕권을 차지한 뒤, 기존의 폐쇄적 정책을 타파하여 전 세계 흑인 형제들을 품에 안겠다는 계획이죠. 물론 이 '쿠데타'는 실패합니다. 그러나, 이 실패의 과정은 티찰라 국왕의 인식을 변화시키는데요. 비록 에릭 킬몽거는 왕권 찬탈을 자행한 반역자였지만, 그와의 설전과 혈전을 통해 주인공 티찰라는 서서히 와칸다만의 국왕이 아닌, 모든 흑인 민족의 지도자로서 성장합니다.

 

와칸다의 국왕 티찰라(블랙 팬서)와 결투를 벌이는 에릭 킬몽거,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티찰라와의 결투 끝에 숨을 거두는 에릭 킬몽거. 이런 유언을 남깁니다. "나를 그냥 바다에 묻어줘. 배에서 뛰어내렸던 내 조상들처럼." 이 대사는 역사적 사실과도 연관이 있다고 해요. 이른바 '이그보 랜딩(Igbo Landing)'이라 불리는 사건입니다. 1803년 백인들에 의해 포로가 된 이그보족 흑인들이, 노예선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바다에 몸을 던진 비극이죠. <블랙 팬서>의 에릭 킬몽거는 19세기 초 이그보족을 자신의 '조상'이라 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ㅣ전사한 대원들을 위해 테러리스트 되다 -프란시스 허멜 장군 in <더 록>

조국을 위해 위험천만한 극비 작전을 감행한 군인들. 결국 대원 여럿이 목숨을 잃고 맙니다. 하지만 정부는 전사자들에게 어떠한 보상도 해주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극비'였으므로, 해당 작전에 투입된 장병들의 존재 또한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 라는 이유 때문이죠. 전사자들을 지휘 통솔했던 여단장은 조국에 대한 배신감을 느낍니다. 그렇게 그는 테러리스트가 되죠.

 

전사한 대원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테러리스트로 타락한 허멜 장군,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1996년 개봉작 <더 록>의 악당 프란시스 허멜 장군(애드 헤리스)의 얘기입니다. 그는 민간인 80여 명을 인질로 잡고, 자신의 요구 사항을 정부가 수용하지 않을 경우 생화학무기를 도시 한복판에 발사하겠다고 협박합니다. 그가 원하는 바, 간단합니다. 전사한 대원들의 존재를 공식 인정하고, 그들에게 퇴역 군인과 동일한 보상을 해달라는 것.

자신과 대원들을 버린 조국을 향해 대량 살상무기를 조준한 퇴역 군인.  그의 타락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지만, 관객들로 하여금 그 타락의 과정을 곰곰 고민해보게 만듭니다.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허멜 장군의 행위는 용서받을 수도, 그 당위성에 대한 이론의 여지 또한 없는 악행이죠. 그럼에도, 자기 조직의 구성원들을 끝까지 책임지고, 심지어 본인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내 사람'들의 명예를 지키려는 태도는 뭉클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비록 테러리스트로 타락했으나, 그 처절한 동료애와 책임감만큼은 곰곰 곱씹어볼 만한 대목이죠.

 


ㅣ적이지만 흠모할 수밖에 없는, 이토록 매혹적 악당이라니 - 동방불패 in <동방불패>

 

앞서 소개해드린 <더 록>보다 더 오래된 영화 한 편을 가져왔습니다. 1992년작 <동방불패>인데요. 무협영화 팬들에겐 명작으로 손꼽히기도 하죠. 개봉 당시 중화권 최고의 스타였던 이연걸, 임청하, 관지림, 이가흔의 찬란했던(?) 전성기 시절을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강호 최강이 되기 위해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화한, 즉 '나'를 완전히 바꾼 악당 동방불패,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특히 <동방불패>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독특하고도 매혹적인 악당 캐릭터를 선보였는데요. 그 이름은 바로, 제목과 같은 동방불패(임청하)! 동방에서 결코 패하지 않는다는 절대고수입니다. 그는 '규화보전'이라는 전설의 책을 읽고 최강 무공을 터득한 인물이죠. 그런데, 그 과정에서 커다란 신체적 변화를 맞습니다. 본래 남자였으나, 혹독한 수련을 거치며 여자로 변화한 것.

일생을 '천하제일 고수'가 되는 데 바친 동방불패.  흔들림 없이 앞만 보며 내달린 인물이건만, 어째서 이런 처연한 눈빛을 지니게 된 걸까요.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영화의 주인공인 방랑검객 영호충(이연걸)은 동방불패에게 연모의 정을 품게 되는데요. 상대가 극악무도한 악인임을 알고 있음에도, 영호충은 동방불패를 쉽사리 내치지 못합니다. 동방불패 또한, 약육강식의 논리보다 사람 간의 정을 더 중시하는 영호충에게서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죠. 강호 최강이 되고자 자신의 육체를 바친 동방불패와 달리, 영호충은 영웅이니 고수니 최고니 하는 세간의 평가 따위 쿨하게 무시합니다. 그저 맛 좋은 술 한 잔이면 천하를 다 가졌다 생각하는 '소확행'의 고수거든요. 이렇듯 서로 적이면서 서로 흠모하는, 주인공과 악당 사이에 흐르는 실로 오묘한 감정선! 이 점이 바로 <동방불패>의 동방불패를 매혹적 악당으로 격상시키는 지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