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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대 중고등학생들은 스마트폰을 손에 쥐지 않았습니다.
유튜버에 열광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모뎀을 켜고 PC통신이라는 걸 했죠.
삐-삐비비-
요상한 소리가 그치고 나면 새로운 세계가 여렀습니다.
하이텔, 천리안, 유니텔, 나우누리, ···
그곳에서 90년대 중고등학생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소설을 읽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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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통신문학'이라는 말, 혹시 들어보셨나요? '사이버 문학', '컴퓨터통신문학'이라고도 불립니다. 아니, 불렸습니다. PC통신문학은 하이텔, 천리안 등 PC통신망에 연재되던 소설들의 총칭입니다. 90년대 대중문화를 이끌었던 콘텐츠 영역 중 하나였지요. 당시에 학창 시절을 보내신 분들이라면, PC통신문학의 인기를 기억하실 텐데요. 오늘날 유튜브 채널들의 인기와도 견줄 만한 정도였죠. PC통신문학의 대표작 <퇴마록>이 애니메이션과 웹툰으로 제작된다는 뉴스가 최근 있었습니다. 8090 세대에게는 꽤나 반가운 소식일지도 모르겠네요. '뉴트로(new-tro) 열풍과 더불어 90년대 PC 통신 소설들도 재조명되는 것인가' 하고 슬며시 기대감을 품으신 분도 계실 듯 합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이쯤에서 다시 보는 PC통신 소설 명작 열전!
ㅣ 한국형 판타지 소설의 서막 <퇴마록>
첫 번째로 살펴볼 작품은 앞서 언급했던 <퇴마록>입니다. '오컬트 판타지' 혹은 '한국형 판타지'로 일컬어지는 소설이에요. 국내편 3부작, 세계편 4부작, 혼세편·말세편 각 6부작 등 전체 열아홉 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입니다. 1993년 하이텔에서 연재가 시작된 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붐을 일으켰습니다. <퇴마록> 시리즈의 성공 이후, 하이텔을 비롯한 여러 PC통신망에는 판타지 소설란이 생성되면서 다양한 장르문학이 넘쳐나게 되었어요.
워낙 이슈가 됐던지라 원작자 이우혁에 대한 요상한(?) 소문도 발생했습니다. <퇴마록>은 제목처럼 퇴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박 신부, 현암, 준후, 이 세 인물이 주인공들이지요. 국내외 각종 마귀들이 등장하다 보니, 독자들 사이에서 작가가 무속인일지도 모른다는 오해가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물론 사실이 아니랍니다) <퇴마록> 시리즈의 인기는 PC 통신망을 넘어 출판 분야로 확장됐고, 지금까지의 누적 판매량은 1,000만 부 이상입니다. 소설의 인기에 힘입어 1998년 영화로도 제작되었어요. 안성기, 신현준, 추상미 등 스타 배우들이 출연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애니메이션과 웹툰으로도 만날 수 있게 됐습니다. 2022년 공개 예정이라고 하니, 좀더 기다려야겠군요.
ㅣ 그 시절 소년들은 '후치 네드발'이었다! <드래곤 라자>
판타지 소설에 전혀 관심 없는 분들도 <드래곤 라자>는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것 같습니다. <퇴마록>과 함께 9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린 판타지 소설이에요. 첫 연재는 1998년 하이텔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나우누리, 천리안, 유닡텔 등 PC통신망에도 속속 게재되었습니다. 원작자 이영도 작가는 우리나라 1세대 판타지 소설가로서, 지금까지도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어요.
<퇴마록>이 PC통신 소설의 포문을 열었다면, <드래곤 라자>는 대한민국 대중문화 시장 안에 '판타지'라는 장르를 견고히 생성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작품은 <반지의 제왕>이나 <나니아 연대기> 같은 서구 판타지 문학과 유사한 세계관을 지니고 있어요. 인간, 엘프, 오크, 마법사, 드래곤 같은 다양한 종족이 등장합니다. 한국에서도 이런 서양 판타지물이 통할 수 있다는 점을 최초로 증명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어요. <드래곤 라자>를 열독했던 독자라면, 자신과 주인공 '후치 네드발'을 동일시하며 울고 웃던 기억이 있을 겁니다. 소설 읽느라 모뎀을 너무 오래 켜둔 나머지, 부모님께 통신비 폭탄을 선사한 분도 몇몇 있을 거예요. 추억이 방울 방울~
ㅣ 하룻밤 만에 끝장내는 소설! <마지막 해커>
PC통신 소설이 전부 <퇴마록>이나 <드래곤 라자> 같은 판타지였던 것은 아닙니다. 일일이 다 열거하기 힘들 정도의 장르물이 넘쳐났거든요. 판타지 외 장르로서 가장 독보적인 호응을 이끌어낸 작품이 있었으니, 이름하여 <마지막 해커>! 황유석 작가의 연재 소설로, 해커들의 연쇄 의문사를 파헤치는 주인공 '기현'의 고군분투를 미스터리적인 분위기로 그려냈습니다.
<마지막 해커>는 유니텔 '호러'란에 연재된 지 1주일 만에 사상 초유의 조회 수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사상 초유의 조회 수'에 대한 구체적 수치는 전해지지 않으나, 당시 PC통신 사용자들에 따르면 최고 조회 수가 300만에 가까웠다고 하는군요. <퇴마록>, <드래곤 라자>처럼 <마지막 해커> 역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습니다. 1998년 두 권 구성으로 서점 매대에 진열되었고, 10년 뒤인 2008년에 개정판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해커>는 '단숨에 읽는 소설'로도 유명합니다. 단행본 출간 후 1~2권을 하룻밤 만에 다 읽었다는 독자들이 속출(?)하기도 했죠. 그래서인지 '시간 잘 가게 해주는 책'이라는 별명을 달고 있답니다.
ㅣ 올여름은 레트로 납량특집 어때요 <어느 날 갑자기>
90년대 PC통신문학 작품은 대체로 장르물이었습니다. 여러 장르들 중에서도 판타지와 호러에 대한 인기가 상당했어요. 90년대 중후반 하이텔 가입자였던 분에겐 '유일한'이란 이름이 익숙할 겁니다. 이른바 '괴담 작가'라는 타이틀을 지닌 인물(오늘날의 표현으론 인플루언서)이었어요. 하이텔 게시판을 뜨겁게, 아니 차갑게 만드는 데 선수였던 소설가였답니다.
유일한 작가는 1995년부터 중단편 공포 소설을 하이텔에 연재했습니다. 첫 작품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더라도>를 시작으로 40여 편가량의 작품들을 발표했어요. 1990년대 중후반 유일한 작가의 소설은 큰 인기를 끌었어요. 이른바 납량특집 콘텐츠가 유행이던 당시, '컴퓨터 피서'라는 말을 탄생시킬 만큼 공포물로서 확고한 존재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유일한 작가는 현대인들의 불안을 괴기스러운 사건 안에 녹여내는 작품을 다수 발표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E메일>이라는 단편소설이에요. 주인공이 구직난에 시달리던 중 'LivE'라는 낯선 계정으로부터 메일을 받으면서 점차 정신착란을 겪는 내용입니다. LivE를 거꾸로 읽으면 EviL, '악마'가 돼요. 취업 준비생의 심리적 불안을 공포 소설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독자에게도 충분히 공감을 얻을 수 있을 듯 합니다. 유일한 작가의 작품은 <어느 날 갑자기>라는 제목으로 엮여 출간됐습니다. 올 여름은 90년대 레트로 감성의 납량특집물을 시도해보시는 건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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